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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 WORLD

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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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와 교육의 필요성

 

인간의 환경파괴 성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류가 수렵채취생활을 하던 그 옛날에도 주변 환경이 파괴되거나 식량이 부족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로마의 도시들이 오물과 쓰레기로 뒤 덮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DNA 분석 결과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가 공동조상으로부터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500만년 전의 일이다. 500만년이란 시간은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에 비유한다면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현대 인류(Homo sapiens)가 탄생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15만 내지 23만년 전의 일이고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창조"된 동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인류의 조상은 열대림을 떠나 초원과 교목림으로 나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살게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만 여 년 전까지는 수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한 종의 영장류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는 불과 1만 년 남짓의 지극히 짧은 시간에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기계문명 사회를 이룩하게 되었다. 인간이 평범한 한 종의 영장류에서 오늘날 이 지구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게끔 진화한 동물이다.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환경을 이용할 줄 아는 가장 막강한 경쟁력을 지닌 동물이다. 다만 우리의 경쟁 상대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느 다른 동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일 뿐이다. 인간은 이 같은 상황에서 모두를 위해, 즉 소속된 집단 또는 인류 전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생태계에서 함께 살아남는 방법이란 배우지 않고는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생태학(Ecology)은 생물과 환경과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태학에서 다루는 환경은 단순히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인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른바 생물학적 환경(biological environment)도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과 다른 동식물들 그리고 지구의 물리적 환경과의 관계 모두가 다 생태학의 연구 과제이며 올바른 생태학적 지식의 축적이 우리를 온갖 환경 문제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지름길일 곳이다.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생태학이 일반인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게 된 가장 결정적인 첫 계기는 역시 1962년 Rachel Carson이 유명한 <침묵의 봄(Silent Spring, Boston: Houghton Mifflin)>을 출간했을 때였다. 이 책을 통해 Carson은 농작물의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뿌려댄 살충제 DDT가 먹이사슬의 상위권에 위치한 동물들에 이르면 치명적인 수준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인간의 무분별한 행위가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생존마저도 위협하게 되는 생태계의 원리를 설득력 있게 가르쳐 주었다.

 

1906년 미국 정부는 애리조나주의 그랜드캐년 북쪽에 있는 케이밥 고원(Kaibab Plateau) 지대를 동물보호지역으로 설정했다. 그 지역에 사는 사슴 집단을 보호하여 사냥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시작된 이 사업에서 우선적으로 수행된 작업은 보호지역 내에 있는 포식동물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향후 25년동안 산사자, 늑대, 카이욧, 삵괭이 등 약 6천마리의 포식동물들이 죽어나갔다. 그 중 늑대는 그 지역에서 완전히 멸종되었다.

 

포식동물들이 사라진 후 사슴 집단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 4천 마리로 시작했던 집단이 1923년에는 6만 내지 7만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공원관리인들은 이미 1918년부터 사슴들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관찰했다. 결국 1925년에는 전체 집단의 약 3분의 2 정도가 사망했고 1939년에는 그저 1만 마리 정도가 남을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1만 마리라는 크기는 원래 집단의 크기인 4천 마리에 제거된 6천 마리의 포식동물들의 수를 합한 것이었다.

 

생태학적인 이해가 없이 수행한 관계로 시간과 비용만 낭비한 채 실패한 사업이었다. 포식동물들이 피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엄연히 관찰되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식동물들을 제거하는 것은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일이다. 포식동물은 생태계 구조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일깨워주는 실례였다.

 

온갖 모습의 환경 오염은 물론, 식량 부족, 벌목으로 인한 산림의 황폐화, 서식지 파괴가 가져온 많은 동식물들의 멸종위기 등 이른바 환경 문제의 거의 모두가 궁극적으론 숫자의 문제이다. Paul R. Ehrlich와 Anne H. Ehrlich이 1968년에 펴낸 <The Population Bomb (Mattituck, New York: Amereon)>은 개체군의 수적 변화 기작과 그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영향, 특히 인류 집단에 미치는 영향을 생태학적으로 분석한 고전이다. 지구 생태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물들은 다 자체 내의 밀도가 커짐에 따라 개체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자연히 평형 수준에 수렴하는데 비해 유독 인간 집단만은 농경생활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현재까지도 계속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모든 환경 문제의 근원이라는 이론이다.

 

생태학적 지식의 부족으로 일어난 사례들은 위의 예외에도 매우 흔하게 벌어졌으며 생태학이 상당한 발전을 거듭한 오늘날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생명은 이 지구상에 존재해온 그 어느 체계에 비해 가장 성공한 전략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어진 체계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환경 정책

 

Carson의 <침묵의 봄>은 우리에게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 첫 걸음이자 또 가장 큰 걸음이었다. <침묵의 봄>이 일반 대중을 폭 넓게 교육시켜감에 따라 1969년에는 드디어 미국 정부가 환경보호국(EPA: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란 정부기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EPA가 제 기능을 다하려면 행정부의 다른 부서들이 추구하는 개발 일변도의 정책들과 종종 격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 클린튼 대통령은 집권과 동시에 EPA를 다른 정부 부서들로부터 분리시켜 부통령 직속으로 개편했다. 최근에는 다시 대통령 직속으로 재편성된 환경보호국은 로비활동과 여론조성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여류 행정가 캐럴 브라우너 국장의 활약으로 미 대륙의 든든한 환경파수꾼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나라의 환경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은 1980년 1월 환경청으로 출범한 후, 1990년 1월 환경처를 거쳐 김영삼 대통령 시절 환경부로 승격되었다. 구조적인 면에서만 보면 짧은 시간에 비교적 많은 발전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경제개발 위주의 국무회의에 홀로 독야청청 할 수밖에 없는 체제로는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다 고참 정치인이 환경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런 대로 보호를 받다가 힘없는 장관으로 바뀌거나 선거철이 되면 그나마 간신히 버텨오던 보호망이 봇물 터지듯 하는 조직으로는 절대로 보전할 수 없는 게 환경이다.

 

몇 년 전 나는 모 일간지를 통해 정부에 환경부총리제를 건의한 바 있다.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하는 마당에 무작정 부총리를 하나 더 추가하라는 제안은 아니었다. 경제 부총리와 환경 부총리를 양대 진영으로 놓고 경제 부총리의 관할에는 모든 경제관련 부서들을 묶고 환경 부총리 산하에는 환경보전과 삶의 질 향상에 관여하는 기존의 여러 부처들을 통합하자는 뜻이었다. 위상이 비슷한 두 부총리간의 견제와 협조만이 삶의 질을 겸비한 실질적인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양대 부총리제가 부적합하다면 차라리 미국처럼 환경부서를 독립시켜 대통령 직속으로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리곤 환경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행정업무는 그 부서의 인준을 받도록 해야 한다. 환경부서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무엇보다도 충분한 예산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환경세를 따로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환경세입의 전부가 환경부서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쓰인다는 보장만 있으면 국민은 기꺼이 따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의 결과 환경 문제가 제일로 나와도 우리네 위정자들은 설마 하며 믿으려 하지 않는다. 국민의 의사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함께 건의한다.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 나는 세금을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된 주지사가 환경세 만큼은 따로 받았으면 하는 계획을 다시 주민투표에 붙여 허락 받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국민의 환경에 대한 인식도는 선진국 수준을 능가한다. 우리는 획기적인 환경대책을 원하고 있고 그를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우리 경제는 최근 OECD에 가입하는 등 선진국 대열을 향하여 힘찬 발돋움을 하는 듯하더니 뜻하지 않은 금융난으로 급기야는 IMF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또 그러러면 새로운 의식구조로 재무장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의식을 개조하자고 제안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식의 무지스런 구호중심의 운동으로는 우선 급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지는 모르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잘해 보자는 결심이 아니라 새 밀레니엄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일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기가 될 거라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허황된 구호에 현혹되어 무모한 경제개발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마치 다음 세기에 미국과 중국에 맞설 수 있는 초강대국이 돼야 하는 것 같은 강박감에 등을 떠밀리며 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울리는 목표인가? 국토 면적으로 보아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중의 하나이고 현재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의 목표가 진정 초강대국이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견실한 경제구조 속에 탁월한 삶의 질을 갖춘 The Netherlands, Denmark, 또는 Singapore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높은 범죄율과 오염된 환경을 필요악으로 안고 있는 경제대국보다는 깨끗한 환경 속에서 적당한 경제 수준을 유지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늘 하는 얘기지만 개발과 보전이 반드시 상충할 이유는 없다. 운용의 묘를 살리면 그리 어렵지 않게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이건만 이제까지는 늘 보전이 개발에 밀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보전이 개발에 밀려서도 아니 되고 밀릴 여유도 없다. 개발은 좀 늦출 수도 있고 계획을 수정하여 다른 방법으로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경은 일단 파괴되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거나 복구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농지 몇 평을 더 얻겠다고 메워버린 갯벌은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한들 되찾을 재간이 없다. 불도저의 발아래 무참히 짓밟히던 때에는 쌀 한 줌보다 경제성이 낮았을 지 모르나 해양자원이 무서운 속도로 고갈되어 가는 요즈음엔 순수하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완전히 밑진 투자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환경을 보전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자연보존에는 전혀 약이 되지 않는 속담이다. 자연은 우선 알아야 보존할 수 있다. 뱀이나 거미를 무서워하던 이도 그들의 행동과 생태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진드기나 벼룩 같은 기생충도 자꾸 들여다보고 연구하다 보면 어느 날부터인가 예뻐 보인다. 유럽의 사상가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아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알아야 사랑한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서로 오해하고 미워한다. 상대를 완전하게 알고 이해하면 반드시 사랑하게 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일단 사랑하게 되면 그를 해치는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알면 사랑한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연에 대해 보다 많이 알게끔 대중을 교육해야 한다. 개천가에 버려진 비닐봉투나 깡통들을 줍도록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에 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더 많은 연구를 해야하고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반 대중, 특히 차세대의 어린이들을 교육해야 한다.

 

글/ 최재천 국립생태원장 (글쓴 때 :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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